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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바람

2009-05-02 | 6525

 

 

햇살곱고 봄이 깊은 날,

술통에서 글씨를 연구하는 식구들이 답사와 휴식을 겸하여 담양 소쇄원을 찾았습니다.

 

이 소쇄원瀟灑園은 '시원하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나무숲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맨 먼저 작은 계곡을 아래에 두고
광풍각光風閣이 바람소리를 내며 나그네들을 맞이합니다.
'비가 갠 뒤 해가 뜨며 어디선가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광풍곽을
앞쪽에 수문장으로 세우고 주인장의 독서공간인 제월당霽月堂이 뒷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비 갠 뒤 하늘에 뜬 상쾌한 달’을 의미하고 있는데,
소쇄원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두 건물로써 그 뜻 마저도 모두 자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쇄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담아낸 우리 디자인의 원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입니다.
서구디자인에 맞서는 우리 디자인이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 소쇄원이 아닌가 합니다.
자연이 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빛과 바람, 구름을 끌어들여
인간과 화합하며 숨쉬게 하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그대로 살아있는 건축물 소쇄원.
조선 선비의 대쪽같은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안으로는 내적 수양을 채찍질하고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스승으로 삼는다.
中得心源, 外師造化"

 

이곳을 지은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의 죽음앞에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세상과 등지며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닦고 참된 후학을 길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 선비는 바위 위에 흐르는 물과 바람도 자신을 닦고 업을 씻어내는 도구로 삼았을 것입니다.
공부없음을 부끄러워하고 끊임없이 사색하며,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자신을 갈고닦는 공간 소쇄원.

 

제게도 이 소쇄원은
외로울 때, 기쁠 때, 비가올 때, 글씨를 쓸 때 언제나 생각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소쇄원과 한글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한글 역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무엇보다 중요시한 문자이기에
'소쇄원과 한글은 서로 닮아있다'라고 저는 늘 말합니다.

 

가는 날이 휴일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소쇄원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온 몸으로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은 의외로 컸습니다.
그 아쉬움은 한쪽 가슴을 후비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쇄원을 혼자만 독차지하여 보겠다는 심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느끼고 싶은 욕심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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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눈치라도 챘는지 이번 여행의 안내를 맡아준
광주에서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나루커뮤니케이션 김대종대표는
우리를 또다른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소쇄원을 나와 오던 길로 조금 내려가 식영정(息影亭)에 올랐습니다.
붉은 소나무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푸른 광주호를 내려다 보면 이내

바람이 불어와 친구하자 귓가에 속삭입니다.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莊子는 이 그림자 마저 욕망의 상징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욕망이라는 굴레를 내려놓고 바람과 나무를 벗삼아 잠시 쉬어가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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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소쇄원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환벽당環碧堂입니다.
이곳은 관광객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환벽당은 우리 일행에게 아주 잠시이지만
조용히 바람이 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옛 성현들의 시와 말씀이겠지요.
아주 잘생긴 기와건물에는 우암 송시열선생께서 쓴 현판글씨가 우리를 반깁니다.
힘이 넘치는 글씨는 환벽당의 기와 위에 부는 바람처럼 강하지만 부드러웠습니다.
이곳에서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공부하면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저도 고운 햇살과 바람, 옛 성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환벽당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나뭇가지로 써내려갔습니다. 우습기 짝이 없지만.

 

환벽당
기와 우로
흐르는
바람소리는
노래가 되어
저 큰 강으로
달리우네

 

환벽당에 올라
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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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다시 떠난 일행은 친절한? 대종씨의 안내로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를 더 만들었습니다.

 

소쇄원 조금 윗쪽에 자리잡은 반석이라는 조그마한 마을 안에
찻집 명가은茗可隱에 들러 차한잔의 여유를 즐긴 것입니다.
고즈넉한 정원과 마당을 둘러 마치 사이좋은 친구처럼 서로를 마주보며
서있는 집들은 너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입구에서 부터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운에 어쩔줄 몰라하며
차향 가득한 방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안과 밖의 풍경이 하나되고 봄날의 꽃들은 빛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와
찻잔속에 스며듭니다.
어느새 다향과 꽃향이 하나되었습니다.
새들도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네 모두의 입가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 날이었습니다.

오월의 첫머리에
담양 소쇄원을 찾은 이틀간의 길은
바람이요 빛이요 푸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마움이었습니다.
아, 너무도 큰 고마움에 두손 모읍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길,
작았지만 큰 길을
우리는 마음을 나누며 걸었습니다.

 

 

2009년 5월 2일 소쇄원의 바람에 취하여 영묵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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